
은영씨 스토리
황해북도 사리원 출신인 은영씨는 20여년전 대한민국에 이주해 살아가고 있는 탈북민이다. 북에 있을 당시, 남부럽지 않은 집안 환경에서 살아온 은영씨는 대학 진학을 희망하는 부모님의 기대와 달리 군에 입대했다. 고난의 행군 당시 군에서 외화벌이 사업으로 식량을 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가지 않고 그 길로 한국행을 택하게 됐다.

불편한 것 없이 살아왔던 은영씨에게 남한에서의 새 출발은 험난했다. 사회적자본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은영씨의 한국에서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투자를 하면 손해만 보기 일쑤였고 심지어 ‘간첩’이라는 누명까지 쓰는 등 힘든 일이 잇달아 닥쳐왔다. 게다가 그런 일을 겪으면서 평소 친하다고 여겼던 친구들마저 떠나 버리는 바람에 은영씨의 상황은 더욱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은영씨는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절망의 끝에서 은영 씨를 버티게 한 것은 지금의 남편 김성호 선장이다. 은영씨의 다사다난하고 두서없는 이야기를 말없이 듣고 위로해 준 따뜻한 사람 김성호 선장.
비록 가진 것은 많지 않았지만 은영씨는 그에게 기대고 싶었고, 그렇게 둘은 남편의 고향인 전남 강진으로 내려왔다.

어떻게든 먹고살아야 했기에 은영 씨는 3천만 원 가량의 어구를 구매해 주꾸미 잡이를 시작했다. 바다 일에 익숙한 남편을 믿었기 때문이다. 첫 수확 당시 은영씨는 투자금을 손해라도 보지 않기만을 바랬지만 첫 작업을 마치고 얻은 순수익은 무려 135만 원.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고생한 은영 씨에게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3년 동안 주꾸미와 문어를 잡으면서 빚도 다 갚고 여윳돈이 생길 무렵, 은영 씨의 남편 김성호 선장은 전복양식업을 하자고 제안했다. 한철 작업인 주꾸미와 문어 잡이에 비해 전복양식업은 휴업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영씨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전복을 기를 가두리 양식장과 전복·미역·다시마 종자값을 계산해보니 생각보다 많은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편을 믿고 전복 양식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전복은 만 3년은 돼야 출하할 수 있기 때문에 그전까지는 수입이 없다. 수입은 없이 계속되는 투자와 갑작스레 떨어진 전복 값 때문에 마음고생이 매우 심했던적도 있었다.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주저앉았지만, 은영 씨와 김성호 선장은 참을성 있게 양식업을 이어갔다. 전복 양식을 시작한 지 5년 차부터 은영 씨의 양식장은 일손이 모자랄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
전라남도 강진 어촌에 터를 잡은지 10년만에 은영씨는 강진군에서 전복양식생산량 2위, 전라도에서는 다섯손가락안에 드는 전복생산량을 자랑한다. 은영씨는 전복양식에 이어 이제는 탈북민과 지역주민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전복가공업에 도전하고 있다.
